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소로스 (문단 편집) == [[영국 파운드|파운드화]] 공매도 == [[1990년]], [[영국]]은 [[유로화|유럽 내 단일통화권]] 구축을 위해 만들어진 과도기적인 체제인 ERM(환율조정메커니즘)에 가입한다. 이에 따라 파운드화는 [[독일 마르크]]화 대비 상하 6% 밴드 내에서만 움직이도록 고정이 되었고[* 경제 규모에 따라서 달랐는데 작은 국가의 경우 2.5%였고 영국은 큰 경제력을 지닌 국가였기 때문에 6%로 비교적 밴드의 범위가 컸다.] 밴드에서 벗어날 정도의 변동성이 발생할 경우 [[영란은행]]이 즉각적으로 개입해서 파운드화 가치를 안정시킬 의무가 생겨났다. 같은 해 [[동서독 통일|독일 통일]] 이후, [[독일]]은 [[동독]] 발전을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하게 되고 막대한 화폐가 풀리면서 [[인플레이션]]을 방어하기 위해 [[분데스방크]](독일 연방은행)는 '''2년 동안 10차례나 금리를 인상'''하는 초강수를 두게 되었다.[* 현재 연준의 금리결정을 위한 회의는 일년에 8차례이다. 2년이면 16차례인데 그 가운데 10번의 금리인상이라면... 후덜덜한거다.] 자연히 [[독일 마르크|마르크]]화는 강세를 나타냈고[* 금리 인상 → 자금 유입 → 해당국 통화 강세] [[파운드 스털링|파운드]]화의 가치를 밴드 내로 유지하기 위해 [[영란은행]] 역시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금본위제]]에서도 각국의 금리 변화의 동조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금리 변화는 각국의 경제 사정과는 무관하게 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자 독일만큼 튼튼하지 못했던 영국경제로 인해 [[실업]]률은 두자릿수까지 치솟았고 경기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영국은 ERM 탈퇴 대신 [[영란은행]]이 열심히 파운드화를 매수하며 파운드화 하락[* 실업률 치솟고 경기가 나빠지니 당연히 파운드화는 떨어지는 게 정상이다.]을 방어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소로스와 [[스탠리 드러켄밀러]][* 이 당시 소로스의 펀드를 위탁운용하던 매니저, 이 사람도 장난아니다. 소위 [[천재]]. 소로스가 쓴 '금융의 연금술'을 읽고 토론을 하고 싶다고 찾아오자 소로스가 채용을 제의했다.]를 비롯한 영민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가능한 모든 자금을 동원해 파운드화의 공매도에 나섰다. 이번에도 자존심 강한 영국은 단기금리를 10%로 인상하며 파운드화 방어에 나섰으나 시장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항복, [[1992년]] [[9월 16일]] ERM을 나가게 된다. 그리고 파운드화는 수직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고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 그 해 소로스의 수익률은 무려 68%. 파운드화 매도를 통해서만 무려 11억 달러(약 1.2조원)의 수익을 올린 것이다.][* 참고로 요샌 이렇게 베팅하는 헤지펀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스타일은 언뜻 보면 상당히 멋있고 화려해보이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예를 들어 소로스의 경우 [[1987년 블랙 먼데이]] 당시 한 주간 8억 4천만 달러(9200억원)의 손실을 봤으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닷 컴 버블]] 붕괴 때에도 역시 천문학적인 손실을 맛보았다. [[2000년대]] 들어서 대형 기관투자자들의 헤지펀드 투자가 늘어나면서 자연히 헤지펀드들의 투자 스타일 역시 (안정형으로) 바뀌고 있다.] 결국 패배한 [[영국]] 정부는 [[유로화]]로의 전환을 포기했다. 이러한 공격방법이 왜 위험한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일단 이 방법의 핵심은 공매도라는 방식의 위험성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 공매도를 통해 2000원으로 1파운드화를 사는 과정 없이 미리 빌렸다치고 팔아놓고 나중에 파운드화가 1000원으로 떨어졌으니 차익에 해당하는 천원을 지불하라는 방법인데 문제는 파운드화가 천원으로 떨어지려고 하면 당하는 쪽에서 눈앞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는게 뻔히 보이기 때문에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죽기살기로 달려든다. 비록 영국 정부의 재정 상황을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지만 엥간한 곳에서는 씨알도 안먹히고 손해만 보다 끝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일은포]] 사건. 일본 정부의 재정 상황은 영국과 달랐기에 헤지펀드들은 패배하고 떠나야 했다.[* 소로스도 영란은행 이후 중국 위안화를 공격했으나 이나라가 일반적인 경제논리로 돌아가지 않는 환율조작국이라…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사실 정확하게 말해서 이 [[영란은행]]을 공격하는 작전의 입안자는 드러켄밀러였으며 그가 입안한 계획을 검토하고 허가를 내준 이가 소로스였다[* 초반에 드러켄밀러는 15억 달러 (한화 약 1조 6000억 원)를 공매도 할 것을 제안했지만, 소로스가 기회는 확실히 잡아야 한다며 '''미친''' [[레버리지]]를 사용해 100억 달러 (한화 약 11조 원)를 공매도했다. 만약 드러켄밀러의 통찰력과 소로스의 대범함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 세기의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영란은행에서 소로스의 펀드는 엄청난 수익률을 올렸지만 이후 [[1998년]] [[LTCM|롱텀캐피탈]] 파산 사태와 [[2000년]] [[닷 컴 버블]] 붕괴로 퀀텀펀드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손실(LTCM때 15억 달러, 닷 컴 버블 때 70억 달러)을 냈고 결국 퀀텀펀드 내에서 공격적인 투자전략만을 고집하던 [[스탠리 드러켄밀러]](Stanley Druckenmiller)는 결국 퀀텀펀드를 떠난게 된다[* [[1981년]] [[헤지펀드]] 시장에 처음 들어온 드러켄밀러는 독자 펀드를 이끌다가 [[1990년]] 퀀텀펀드에 합류, [[1992년]] [[9월 4일]]의 파운드화 공매도 작전을 주도적으로 입안했다. 조지 소로스는 드러켄밀러가 입안한 이 작전에 동참하여 영국을 골로 보내버리고 엄청난 수익을 챙겼다. 그러나 [[1998년]] LTCM, [[2000년]] [[닷 컴 버블]]로 인해 퀀텀펀드가 엄청난 손실을 보자 책임을 지고 작전 입안자인 드러켄밀러는 퀀텀펀드를 떠났다. 이후 드러켄밀러는 퀀텀펀드에서 은퇴([[2001년]])했고, [[마이크로소프트]], [[메리어트]]호텔 등 미국 유력 [[대기업]]들의 [[사외이사]]를 맡다가 [[2016년]] 자기 재산(약 44억 달러)을 기반으로 기존 운용하던 듀케인 캐피탈 (Duquense Capital)을 운용하다가 [[2017년]] 완전히 현업에서 은퇴했다. 이후 퀀텀펀드는 보수적인 운용을 하여 안정적인 수익 전략으로 돌아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